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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Note.
doohee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유치원에 가는 대신 바둑학원에 다녔다. 바둑학원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범절을 가장 중요시하는 곳이다. 그래서 학원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어른들께 공손하게 인사를 잘 하라'는 미션을 주셨다. 완벽한 임무 수행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는 어른들마다 붙잡아 세워두고 인사를 드렸다. 오빠는 그런 내가 창피하다며 마구 혼을 냈다.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인사를 드려야 하는 어른과 드리지 말아야 할 어른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그때부터 나는 내가 '아는' 어른들께만 인사를 하기로 했다. 타깃은 야쿠르트 아주머니, 두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동 경비아저씨.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어김없이 살구색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아주머니와 마주쳤고, 땀범벅이 되는 오후 4시가 되면 종소리를 울리며 두부 트럭이 나타났다. 이제 마지막으로 경비아저씨께만 인사 드리면 그날의 모든 임무가 끝나고 하루만큼 더 착한 어린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경비실에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 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까봐 불안한 마음으로 유리창 안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때, 아저씨가 늘 앉아 계시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소보로빵 한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와 소보로빵이라니. 나에게 아저씨는 마주칠 때마다 반드시 인사를 드려야 하는,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기 '퀘스트를 주는 NPC ㅈ한 분일 뿐이었다. 쉬면서 빵을 드신다거나, 빵 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맛을 고르시는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빵 하나로, 내가 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따듯한 소보로빵이 있다. 그리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작업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 사소하고 지루해 보이는 것들까지 판단 없이 그대로 담는 일.
알아가려는 순간, 그 사람은 내 시선 안에 갇힌다. 그래서 나의 작업은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수용해나가는 것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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